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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살아가는이야기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by 크레도스 2021. 1. 15.

 연세 지긋하신 직장 상사님 자리에 그림책이 놓여 있었습니다. 아들, 딸은 예전에 출가했다고 들은 터라 손자, 손녀들에게 읽어주려고 가져오신 책인가 싶었습니다.

 동화책을 안 본 지 2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아이가 어렸을 때 함께 읽었던 추억이 떠올라 실례를 무릅쓰고 그림책을 펼쳤습니다. 무슨 내용일까 대충 훑어보려고만 했는데 첫 장부터 빠져들었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고민하는 내용이 책에 담겨 있었습니다.

 '성공은 무엇일까요?'

 돈, 명예, 사랑, 행복. 저마다의 가치판단이 있을 테니 콕 찍어 ‘이것이 정답이다’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긍정적인 마음, 어떻게 해야 가질 수 있을까요?'

 인생을 살면서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긍정적인 마음을 많이 가지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 수 있을까 고민하며 노력합니다만 쉽지 않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무엇으로 살아갈까?'

 알 수 없는 미래, 그보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내일 일에 걱정과 불안으로 보낼 때가 적지 않습니다. 가진 것도 없고 잘난 것도 없고 나이 들어서도 이룬 것이 없어 흔히 말하는 루저가 아닌지, 여태껏 뭘 하며 살았나 후회 들 때도 많습니다.

 '대체 나는 누구인가?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옵니다.

 

 실마리라도 찾으려고 여러 심리학 책을 읽어 보고, 얇은 지식으로 철학 책, 종교 서적도 펼쳐봅니다. 유명인들의 강연도 들어 보기도 하고요.

 읽어도 내용이 너무 어려워 이해 못 하는 게 대부분이고, 읽다가 덮은 책도 꽤 됩니다. 나이가 드니 '아하' 하며 깨달았던 내용도 내일이 되면 까맣게 잊어버릴 때가 태반이죠.

 그림책은 소년과 두더지와 말과 여우의 우정을 다룬 스토리입니다. 우연히 집어 든 그림책이 재미를 넘어 평소 고민하던 문제에 대해 명쾌한 답을 제시합니다.   

 


 

“네 컵은 반이 빈 거니, 반이 찬 거니?” 두더지가 물었어요.

긍정이냐, 부정이냐를 다룰 때 자주 등장하는 물컵 비유죠.

당연히 ’아직 반이나 남았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소년이 말했습니다.

“난 컵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은데.”

읽자마자 멍했습니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았다는 말이 이를 두고 한 듯합니다.

 

“난 아주 작아” 두더지가 말했어요.

“그러네” 소년이 말했지요.

그러면 대개는 ‘타고난 건 어쩔 수 없지만 노력하면 더 큰 걸 얻을 수 있다’, ‘작지만 강해질 수 있다’ 같은 대답으로 교훈을 주었는데요.

소년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지만 네가 이 세상에 있고 없고는 엄청난 차이야”

존재 의미에 대해 이보다 더 좋은 말이 있을까 싶습니다.

 

여러분은 살면서 얻은 가장 멋진 깨달음은 무엇인가요?

노력하면 안 되는 일 없다? 인생지사 새옹지마? 영원한 것은 없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사랑이 최고다? 남는 건 사람이다?

“살면서 얻은 가장 멋진 깨달음은 뭐니?” 두더지가 물었어요.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지금의 나로 충분하다는 것.”

 

“우린 내일 일을 몰라” 말이 말했습니다.

내일 일을 모르니 미리 대비하고 준비하라, 그렇다고 불안에 떨지 말라고 배웠습니다. 이 책은 당연히 그런 말이 아니었고요. 대답은요,

“우리가 알아야 할 게 있다면 그건 지금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거야.”라고 합니다.  

 

“넌 성공이 뭐라고 생각하니?” 소년이 물었습니다.

이 물음에는 어떤 답이 나올지 궁금했습니다.

두더지가 대답합니다.

“사랑하는 것.”  

 

“너 자신이 정말 강하다고 느낀 적은 언제야?” 소년이 물었습니다.

내가 강하다고 느낀 적이 언제인지 묻는다면 선뜻 대답이 안 나와요, 강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던 것 같고요.

“내 약점을 대담하게 보여줄 수 있었을 때”라고 하네요.

대답을 듣는 순간 '아~' 하며 고개가 절로 끄덕여집니다.

 

"시간을 낭비하는 가장 쓸데없는 일이 뭐라고 생각하니?"

얼핏 드는 생각은 잠? 걱정? 게으름? 실패? 이런 단어들이 떠오릅니다.

두더지가 대답했습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일"

명쾌하지 않나요? 다른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스스로 비교하며 스스로 열 받고 스스로 괴로워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잖아요. 인생을 허비하면서 말입니다.

 

틀리지 않고 실패 없이 살기를 바랍니다. 꿈을 꾸는 대로 원하는 대로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상상을 합니다. 함께 잘 사는 완전한 세상도 꿈꾸고요.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기대도 하죠.

"가장 심각한 착각은?" 여러분의 대답은?

두더지가 말했습니다.

"삶이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 말고도 여운이 가시지 않는 내용이 여럿 있습니다. 어떤 책인지 대충 보려고 했는데 그림책을 덮을 수가 없었습니다. 논리적인 설명도 없고요, 미사여구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림이 화려하지도 않습니다. 모르는 내용은 하나도 없고 극히 기본적인 이야기를 쉽게 쓴 책인데 감동은 도무지 가시질 않았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책은 어른과 아이를 위한 책이라고 말입니다.  

 


 

언제 오셨는지 상사님이 저를 보며 빙그레 웃으십니다. 다 읽을 때까지 기다리신 모양입니다.

"다 읽었어? 어때?"

고개는 끄덕였지만 감동 먹은 표정은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나도 그래. 몇 달 전에 딸내미 집에 있길래 생각 없이 읽었는데 너무 좋아서 한 권 샀어. 답답할 때마다 읽으며 위로받아."

 

그동안 사는 이유에 대해, 의미에 대해 답을 쉽게 얻은 듯합니다. 간단명료하고 당연한 이야기인데도 이토록 마음에 와 닿는 건 그동안 고민했던 부분과 일맥상통했기 때문일 거예요.

부족한 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완벽함을 쫓느라 마음을 다치게 하지 말고요. 진리는 지극히 평범 속에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지금 현실을 소소하게 즐기는 나 자신으로 충분하다는 마음가짐이야말로 힘든 요즘 우리에게 필요한 위로와 격려일 겁니다.

 

그림도 크고요, 여백도 많고 글자는 적어서 읽는 데 30분도 걸리지 않습니다만 감동을 느끼고 진지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면 그보다는 오래 걸릴 수 있습니다.

난이도 높은 책, 머리를 싸매가며 읽어야 할 책은 많을 테니 잠시 쉬어갈 때 부담 없이 읽으면 좋을 듯싶고요, 삶의 무게가 버거울 때도 찬찬히 읽으면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내일보다는 오늘이 소중하고, 혼자보다는 함께여서 좋다는 사실은 변치 않을 진리입니다. 코로나 이후 급변할 거라는 시대에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습니다.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도저히 친구가 될 수 없을 것 같은 조합이지만 주고받는 대화 속에 애틋한 사랑이 넘쳐납니다. 이 책에 나온 이 한 줄로 마무리합니다.

 

"삶은 힘겹지만 넌 사랑받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