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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글모음/김현정님 글모음

한국50년과 부동산5

by 크레도스 2011. 9. 8.

위나라의 조조, 촉의 유비, 그리고 오의 손권 이 세사람은 삼국지를 본 분이시라면 대부분 아시겠죠.

자 이 세사람 중에 누가 최후의 승리자인가요?

세력이 가장 컸던 조조인가요?
아니면, 삼국지에서 정통성의 장본인인 유비인가요?
손권인가요?

이 세사람 중 누구도 통일을 하지는 못했죠?
그럼 승리자라 할 수 있을지는 곰곰이 생각할 문제가 아닌가 하네요. 삼국을 통일한 것은 바로 진(晋)나라죠.

조조때부터 조조의 모사로서 위나라의 중신인 사마의는 제갈량과 의 북벌전쟁이 끝난후 위나라의 2대황제(조예)가 죽자 사실상 위나라 조정을 장악해 버린답니다. 그래서 위나라의 모든 실권은 사마의에게 있었는데 사마의가 249년에 죽자 그의 장남인 사마사가 뒤를 이어 위나라 실권은 장악하죠. 하지만 사마사도 병들어 죽고 동생인 사마소가 실권을 장악하는데, 후에 사마소의 아들 사마염이 위나라 황제를 몰아내고 위나라를 멸망시켜 서기 265년 진나라를 세운답니다.
비슷한 시기에, 이미 유비의 촉나라는 유비가 죽고, 사마소가 위나라 실권을 장악하고 있을때 사마소의 명으로 종회, 등애가 이미 서기 263년에 멸망시켰답니다.
결국 촉나라는 위나라가 멸망당하기2년 전인263년에 망했고 위나라는 내부분열로 인한 사마염의 진나라에게 멸망당했죠.
오나라는 사마염이 진나라를 건국한지15년 후인 280년. 진나라의 공격으로 멸망당해 손권의 차남인 손화의 아들 손호가 4대황제로 즉위하고 있을때 멸망당했죠.
결국 위촉오 세나라를 통일한 국가는 사마의의 후손인 사마염이 세운 진나라(晋)랍니다.

잠시 여기서 위,촉,오나라의 황제가 된 계기를 좀 볼가요?

위나라는 조조가 한나라 마지막 황제 헌제를 압박해 자신을 왕으로 봉해달라고 하였는데, 헌제는 압박을 견디지 못해 조조를 위왕으로 봉했죠. 이렇게 해서 위나라가 생겨났지만 아직 조조는 황제가 되지 못했답니다. 그의 아들인 조비가 한나라 황제 헌제를 내쫓으면서 자신이 황위에 올라 그 때부터 위나라가 정식으로 황제나라가 된 것이죠.

촉나라는 조조가 위왕으로 봉해지고 왕위의 오르자 유비도 역적 조조 따위가 왕이 되었는데 나라고 못될 것이있느냐? 하며 자신도 왕위의 올라 촉나라가 세워졌죠. 그 후 관우가 죽는 사건이 있고, 조조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조비가 황제 자리의 오르자 유비는 역적이 한 황실을 모욕하였다며 한 황실의 정통은 유비에게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황제자리의 오르죠. 그 때 부터 촉나라는 촉한이라고도 불러진 것이랍니다.

이처럼 위나라와 촉나라는 자주적으로 세워진 것에 비해 오나라는 위나라의 의해서 세워진 것이나 다름 없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촉나라와의 전쟁에 있죠. 촉나라 유비가 관우의 원수를 갚겠다며 70만 대군을 이끌고 오나라로 쳐들어갔는데, 이에 놀란 손권이 위 황제 조비에게 자신이 신하가 되겠다며 구원병을 요청하였고, 조비는 그 청을 받아 들여 손권을 오왕으로 봉해준 것이죠. 이러니 손권은 자신이 직접 왕위의 오른 것이 아니라. 조비에 의해서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랍니다. 그러다가 후의 유비가 죽고 제갈량이 위나라를 공격해 위나라와 촉나라가 전쟁을 하는 틈을 타 오왕 손권은 황제 자리의 올라 오나라도 황제의 나라가 되게 된 것이랍니다.

결론적으로 오나라의 황제는 손권이 자리의 올랐고, 그후 3대째까지 이르다가 3대 황제 손호가 진나라 황제 사마염에게 항복하면서 천하가 통일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단순히 조조, 유비, 손권이 황제가 된 줄거리를 간단히 이야기 했죠.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삼국을 합친 ‘진나라’의 사마염인데, 그렇다면 사마의를 볼 필요가 있답니다. 삼국지의 제일의 모사인 제갈량과 사마의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겠죠. 바로 이들을 통해서, 성공하는 인재상 중, 나는 어디에 속하느냐도 볼 필요가 있답니다.

간단히 조금씩만 언급하다보니, ‘삼국지’에 대하여 이야기도 한번 나중에 하고 싶네요. 삼국지를 읽다보면, 사람과의 관계에서부터 인생의 계획을 어디에 맞추어야하는지, 그리고 자신은 어느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무엇을 준비해야하는지가 보인답니다.

사람마다 무릇 태어나면서 그 그릇의 크기와 변치않는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기에, 조조가 유비가 되거나, 손권이 제갈량이 될 수는 없답니다. 그러니,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그릇과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를 명확히 알고, 최대한 자신의 장점을 살릴 수만 있다면 이 보다 더 좋을 수가 없겠죠.

한번 나중에 기회가 되면, ‘삼국지’를 통해서 세상과 사람이 어찌 돌아가는지도 이야기 해 보고 싶네요.

‘제갈량과 사마의’ 이야기는 다음 이야기때 또 해보죠.

지난번 ‘강남’개발의 시작인 1970년대를 이야기하다 말았죠?

1970년대는 전국적인 토지개발을 진행하면서도 문제가 되었던 것이 바로 ‘사대문’이었답니다. 돈 있고 힘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사대문 안에 모여살았고, 이곳만이 집중적으로 돈이 투자되어 그때는 사대문안이 지금의 강남과 같았으니까요.

1972년에 서울시가 ‘도심지의 인구 과밀 억제를 위해 서울시 주요 지역 내에 백화점과 도매시장, 공장 등의 신규 허가를 금지한다.’고 발표했죠. 이곳에만 집중적으로 개인자본이 많이 투자되었으니까요. 그리고 1975년 한강 이북 지역의 택지개발을 중단했답니다.

1978년 박정희는 도심에 있지 않아도 되는 시설들. 그중에서도 대부분의 관공서와 공공기관, 사법부를 4대문 밖으로 강제 이전시켰답니다.

또한, 수도권의 인구를 전국적으로 분산시키기 위해서 1977년 7월 대전의 대덕연구단지 등을 비롯해서 임시 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했죠. 노무현 정부때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이 아니라, 실은 박정희 정부때가 최초로 시도된 것이죠. 이를위해서 정부는 충남 논산일대에 부지도 확보했죠. 하지만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계획이 중단되었답니다.

아마 그때 박정희 대통령이 죽지 않았다면, 지금의 서울이나 수도권의 모습은 절대 찾아볼수 없었겠죠. 충청의 대전을 기반으로 남한의 중심이 생겨서 전국적으로 고른 발전을 찾았을텐데, 노무현 정부에서 이 일을 추진하기에는 힘에서 그리고 경험에서 너무나 많이 부족했기에 실패를 한 것이죠.

지금 생각해봐도, 박정희 대통령만한 인물이 나오기 쉽지 않을 듯 하네요. 인물도 인물이지만, 시대도 잘 맞아 떨어졌기에 박정희란 인물이 더욱더 부각될 수 밖에 없지 않나 합니다.

예전에 이야기한 70년대 강남을 다시 이야기 해 볼까요?
70년대 강남은 어떠하였을까요?

그때를 기억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기억이 안 되시는 (젊은 분)분들을 위해 잠시 이야기 하자면, 강남은 그야말로 우리가 고속도로를 타고 멀리 지방에 가면 볼 수 있는 논과 밭이 즐비하였고, 시골길에 집도 없고, 사람도 없고, 도대체 있는 것이라고는 산에 뛰어 노는 야생동물과 그야말로 풀 밖에 없는 시골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곳에 사시는 많은 분들이 대부분이 농사를 지었죠.

1970년대 4공화국 시절 불어닥친 ‘새마을 운동’은 바로 강/남북간의 소득불평등이라는 것을 줄이는 시발점도 되었습니다.
이는 사대문안에 묶여져 있는 모든 경제/교육/문화를 그 밖으로 끄집어 내고자하는 의도도 다분히 있었죠.

그 일환으로 강남의 개발은 시작되었고 그 시초는 바로 끝이 안보일 정도의 배밭이었던 압구정동일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곳이 바로 현재 압구정 현대 아파트 입니다.
온통 난개발로 인하여 좁은 도로와 꾸불꾸불한 강북의 길과는 반대로 강남에 서울 최초로 넓은 직선형 도로를 조성하였는데 그 도로가 바로 ‘압구정로’ 였고요.

하지만 그런 아파트단지 하나 조성하고 넓은 길 하나 있다고 해서 강북의 위상이 꺽일것이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었죠. 그 당시 강북의 위상은 지금은 강남은 비교도 안될 정도였습니다. 양반이라 생각한다면 무조건 강북에서 살았었죠. 그래서 박대통령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특히 중요시 하는 교육에 손을 댔죠.

바로 명문학교의 이전입니다.

이에 1974년 고교평준화 이전, 그 당시 이름을 날리던 경기고, 서울고, 휘문고를 강남으로 이전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한 ‘교육인구이동’은 강남으로의 이동계기가 되었고, 이는 현대아파트에 많은 수요자를 끌게 되었으며 이는 현대아파트 주변에 또 다른 명문고를 탄생시켰습니다.
바로 현대고등학교라는 명문고가 만들어졌던 것이지요.

이러한 교육정책에 힘입어 인구가 지속적으로 늘자, 넘치는 수요에 건설사들은 압구정동 옆 신사동에 지금의 ‘신 현대 아파트’를 건설하였고, 후에 그 효과는 도미노처럼 청담동과 그 주변에 한양아파트를 짓는 결과를 만들었지요.

또한 휘문고를 비롯한 명문고가 위치한 대치동에는 그 주변을 중심으로 80~90년대 8학군을 형성하면서 이른바 ‘학원’들이 들어서기 시작 하였습니다. 이러한 교육정책으로 인구는 지속적으로 유입되었고, 이는 다시 선경, 은마, 미도, 쌍용, 강남, 우성아파트로의 도미노식 파급효과를 나타냈지요.

이러한 개발열풍은 강북으로 집중된 ‘자본’을 강남개발로 인한 이동을 촉진시켰고, 바로 현재의 테헤란로를 만드는 기초가 되었던 것이지요.

여기에 불을 붙인 것이 당시 ‘판검사’가 최고였던 그 분위기를 몰아 ‘서초동’에 현재의 법원과 검찰청이 이전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우수집단인 법조인의 이동. 다시 말해 서초, 반포, 양재, 방배로의 파급효과를 일으켰으며, 이는 삼풍, 삼호, 우성아파트 등으로 그 세력을 넓힌 것이지요.

돈이 되다 보니, ‘압구정현대, 한양, 잠실 롯데, 무역센터 현대, 서초 뉴코아, 대치 그랜드, 서초 삼풍백화점’으로 이른바 ‘로열층’을 대변하 는 백화점들이 경쟁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 이것을 보면서 강북에서 ‘강남’으로의 자본이동에는 바로 기본적인 2가지 반복되는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바로 ‘교육’ 과 ‘먹거리’ 입니다.

60~70년대, 대부분의 먹거리는 동대문, 남대문등 사대문 안에 가내 수공업 형식이거나 자그만 점포를 중심으로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고, 교육 또한 그 사대문 안을 벗어나지 못하였지요.

현재는 어떠한가요?
강북에서 그 두 가지의 실종이 바로 현재의 지역 차를 불러온 것입니다.

현재도 마찬가지 입니다.
구불한 길과 교육 그리고 찾기 힘든 먹거리(직장)은 분명 그 차이를 존재하게 하지요.
물론 강북의 노원을 중심으로한 교육환경은 분명 ‘먹거리’의 이동과 ‘인구’의 이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여서 강남의 8학군을 대체하지 못하고 있는 것 일까요?

기존에 강남의 발전상은 분명 ‘교육정책’의 중심이 큰 핵심을 이루었지만, 그 위에는 바로 ‘국가의 의지’가 바탕이 되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현재의 강북이 강남과의 차이를 줄이기 위해서는 행정을 비롯한 여러 중요정부기관들을 옮겨야 하는데 그 문제가 그리 쉽지 만은 않다는 것이죠. 이것을 알기에 참여정부에서 정부기관을 옮기려 했던 것이고요.
하지만, 기득권이라는 세력의 힘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기에 힘든 문제였고, 일본도 그와 비슷한 ‘국가균형발전’을 위한 정책을 시행했지만, 현재는 다시 원점으로의 회귀로 돌아왔죠.

이와 더불어 ‘먹거리’의 기반이 다져지기 위해서 ‘기업이동’을 통한 ‘일자리 확충’이 절실한데, 이 또한 정부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는다면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먹거리’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강남을 기준으로 한 한강 이남의 경부축! 즉, 버블쎄븐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은 바로 ‘대기업의 제조업’을 비롯한 여러 먹거리들이 즐비하게 그 축을 따라 늘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로 모든 것은 '반복과 회귀'이라는 원칙이 있죠.

몇 년전에 서울의 강북 쪽의 그린밸트와 개발제한구역을 풀겠다는 기사나 나왔습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크죠.
아직까지 그래도 ‘한강 이남의 경부라인’ 보다 저렴한 부지의 제공은 기업들에게 무엇보다도 반길만한 소식이고, 이는 바로 ‘한강이북’ 쪽으로 먹거리가 이동될 수 있는 기회를 뜻합니다.

하지만, 기업이 경기 이북으로 공장을 짓거나 이전한다면 무슨 merit를 줄 것이며, ‘공장이전’이나 ‘신규투자’를 뒷받침 할 만한 내수가 일어나느냐를 기업들이 결정할 수 있느냐 입니다. 이와 더불어, 그 답을 그리고 실행을 지금의 정부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모든 것이 달려있겠죠!

세금이나 일시적 수요로(뉴타운등으로 인한) 일어난 집값은 바로 ‘먹거리’ 와 ‘정부의 의지’그리고 ‘교육’이 뒷받침 되지 않는다면 그 지속성을 가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3~4년전쯤 강북의 다세대 빌라를 중심으로 ‘뉴타운 개발’ 붐이 불었습니다. 제가 볼 때 좀 과하다 싶을 정도라기 보다는 우려스러울 정도 였죠.

예전에 말씀 드렸던, ‘특정투기세력’이 아닌 이른바 ‘서민 형 가수요’가 그 주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더욱 문제이지요. 이들은 바로 우리모습이고 우리 옆집에 사는 일반적인 서민들이지요.
절대 투기세력이 아니고 바로 서민의 모습입니다.

현재 은평뉴타운에서 보듯, ‘먹거리’ 와 ‘교육’에 기반을 두지 않은 개발은 분명 삭막한 시장을 형성합니다.

비슷한 시기 잠실 또한 비슷한 문제에 봉착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래관점에서라기 보다 현재의 관점에서 볼 때, 두 지역의 문제는 그 원인은 약간 다릅니다.
하나는 ‘먹거리와 교육’의 문제이고, 하나는 바로 ‘세금’의 문제이죠.

뭐 ‘먹거리와 교육’은 위 제가 말씀 드린 ‘정부의 의지’ 바탕에 깔리면 모두 저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그리고 긴 안목으로 볼 때, 과거의 경험이 보여주듯 강북/경기이북이 발전되기 위해서는 ‘뉴타운’ 을 통한 ‘재개발’ 이전에 근본적인 원인에 대응해야만 해결책이 될 수 있습니다.
선거때만 되면, ‘뉴타운’이니 ‘재개발’이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그들이 강남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는 환경을 국가가 앞서서 만들어 주는 것이지요.

만일 덩그러니 압구정동에 현대아파트만 있었다면, 현재의 압구정동은 없었겠죠?

요즘 주변에서 보듯, 돈이라는 것은 막아 놓는다면 분명 다시 다른 길로 그들의 ‘확장성’만을 키우겠죠. 그 확장성이 옳은 방향으로의 이동이라면 좋을 수도 있지만, 확장된 자본유입 뒤에 순간적이 자본의 이탈이라도 이루어진다면 분명 서민들만 힘들어지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규제로 인해 집값을 잡으니, 전세가 오르는 것이랍니다.

‘특정지역의 상승’ 만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확장성으로 인한 전 지역으로의 확대’ 가 좋은지는 제가 판단 할 문제는 아닌 것 같군요.
이 모두가 다 서로서로의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이니, 무엇이 옳다 그르다 표현하기에는 ‘객관성’이 아닌 ‘주관성’이 짙은 의견일 테니까요.

몇 년전의 부동산 게시판에 올린 글을 그대로 배껴서 여기에 오늘 쓰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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