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북송때, 사마광이 쓴 ‘자치통감’을 보면 재미난 부분이 나오죠. 제갈량이 오나라 정벌에 나섰다가, 오장원에서 ‘사마의’와 ‘제갈량’의 대치하고 있는 부분이 나온답니다. 번번히 싸움만 하면 지는 사마의는 성문을 걸어 잠근 체, 수개월 동안 대치만 하고 있는 상황이었죠.
제갈량이 사마의를 모욕하고, 책략을 써도 사마의는 성문만 굳게 걸어 잠근체 나올 생각을 하질 않았답니다.
그래서, 제갈량이 사마의 진영으로 사자를 보내, 사마의의 생각을 알아내려 했죠. 하지만, 사마의는 전쟁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은체, 제갈량의 일상생활만을 물었답니다. 그래서 사자는 자신의 상관인 제갈량의 자랑을 늘어놓기만 했죠.
“제갈공께서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 늦게 자는데 하루에 20판(板)이상의 징벌(懲罰)문제를 모두 친히 살펴보고 있습니다. 먹는 양은 몇 승(升)에 이르지 못합니다.” 판이란 공문서를 쓴 목간의 단위죠. 목간 20판이 얼만큼인지는 몰라도 매일 산더미 같은 이 서류를 검토하였으니 몸이 버틸수가 없었겠죠. 또 하루에 몇 승(升)을 못 먹었다니 체력이 다하는 것은 일찌감치 알아챘을 것이고요.
사마의가 말하길, “제갈공명은 밥은 적게 먹으면서 일은 번거롭게 많이 하고 있으니, 그가 능히 오래 버틸 수가 있겠소?” 라 했고 이는 맞아 떨어졌답니다. 그래 제갈량이 병이 나서 죽고, 사마의가 이를 알고 성문을 열고 공격을 했으나, 제갈량의 탈을 쓴 장수를 앞으로 내세워 사마의 군사들이 도망가게 했죠. 이것이, ‘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의를 이겼다.’라는 내용이랍니다.
자 여기서 이제 봐야하겠죠.
제갈량은 분명 사마의보다는 몇 수나 위인 전략가이고 지략가는 역사서나 소설의 내용만을 토대로 보았을 때 맞답니다. 그러면, 개인적인 모양새로만 보았을때, 제갈량이 사마의보다 성공한 사람이냐? 제갈량과 사마의 중에 누가 더 큰 그림을 그릴줄 아냐? 는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 궁금하네요.
촉의 관우가 죽고, 그 이후에, 장비, 유비가 죽은 후에 유비의 어린 아들 유선이 황제로 올랐죠. 그러니까, 나라의 운명이 맡겨진 것이죠. 사람이라는 것이 길어야 100년인 것을 촉의 운명은 유비가 나라를 세운 뒤 기껏해야 몇십년을 제갈량에 의해서 밖에는 지켜질 수 밖에 없었죠.
하지만, 사마의는 어떠했나요?
사마의는 자신이 세상을 떠난 249년까지 큰 아들인 사마사를 비롯한 그의 아들들이 그 뒤를 잊는 것을 시작으로 긴 안목의 틀을 짰답니다. 사마사가 병으로 죽자, 동생 사마소가 다시 실권을 장악하고, 후에 사마소의 아들 사마염이 위나라의 황제를 몰아내고, 진나라를 세워, 위나나와 촉나라 그리고 오나라를 멸망시키죠.
둘 중 똑똑한 것과 지혜로운 것은 분명 사마의보다는 ‘제갈량’에 있다는 것을 누구도 반대하지 않겠죠. 하지만 둘의 차이는 단 한가지랍니다.
자신이 능동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냐, 아니면 수동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냐죠.
능동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은 비록 개인의 능력이 떨어지도라도,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삶을 가진답니다. 하지만, 능동적이지 못하고 수동적인 사람은 그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 나가는데 그 한계가 있죠.
물론, 제갈량이 수동적이라는 사람은 아니랍니다. 하지만, 사마의와 비교했을 때, 보여지는 것만으로 수동적이 었다는 것이죠.
글쎄요.
만일, 사마의가 유비의 밑에 있었다면 역사가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만, 사람의 욕심이나 그릇은 누구의 밑에 있다고 바뀌는 것은 아니라 보여지네요.
결론을 어떻게 지어야 할까요?
후대에 나라를 세운 사마의가 조조보다 훨씬 더 긴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만들었다. 라고 지으면 될까요?
이정도 결론만 지어도 생각이 많이 깊으신 것이겠죠.
저는 이곳에서 제 나름대로의 결론도 지어보았답니다.
무릇 사람의 성향이나 환경은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니,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고요.
제갈량은 스스로에 힘써 그래도 촉의 승상까지 오르며 후대에 이름을 길이 남기고 있죠. 사마의나 그리고 삼국지에 나오는 많은 장수들, 모사들은 그들의 능력이 조조나 유비, 손권에 모자라서 그곳까지밖에 못 오른 것이 아니랍니다. 태어날 때 부터, 자신의 그릇이 크기가 그만큼이었는데, 그래도 스스로에게 힘써 후대에 이름을 남길 정도가 되었다면 자신의 그릇을 다 채운 것이나 마찬가지죠.
모든 사람들이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다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랍니다. 누군가는 똥을 치워야하고, 쓰레기도 치워야하며, 백정이 있어야 고기도 먹을 수 있는 것이죠.
내 그릇의 크기가 얼만큼인지 확인해보려면, 하루하루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시지 마시고, 진실로 내가 열심히 살았냐를 되뇌고 물어보세요.
답은 가까운 곳에 있을 테니까요.
60~70년대를 거치면서 새마을 운동과 1~2, 3차 경제개발 5개년 개획이 진행되었고, 이곳 저곳에서 국토에 대한 종합개발이 수립되고 진행되었죠.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서 절대적인 공급부족을 타결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불도저식 부동산 개발이 진행되었고, 60년대 기업이 주도로 하는 부동산 투기에서 70년대 일반인이 주도하는 부동산 투기까지 진행되었답니다.
하지만, 부동산이 오르면 ‘규제와 세금’으로 막았고, 다시 부동산 시장이 가라앉으면 규제완화라는 카드를 씀으로써 이른바 ‘냉온탕’을 왔다 갔다 했답니다.
이런 정책은 어떤가요?
올 3월까지 DTI 한시적으로 폐지한다고 했죠?
다주택 양도세로 연장했었고요.
정책이 일관성이 없이 이리로 갔다 저리로 갔다하는데, 누가 믿을까요?
지금도 그렇죠?
일관성 없는 정책으로 피해보는 것은 절대 돈 있는 사람들이 아니랍니다. 집한채 장만하려고 하는 일반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것이죠.
지금과 같은 이러한 일관성없는 정책은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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